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2016~2017

Artwork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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어형진_자화상02.jpg

<self portrait> series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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self portrait 1_34.8x27.3_oil on canvas_2016

self portrait 2_90.9x72.7_oil on canvas_2016

self portrait 3_53.0x45.5_oil on drawing board_2016

 나 자신은 완성된 사람인가. 완성되어 질수 있는 사람인가.

사람은 죽기 전까지 완성될 수 있나. 죽음으로 모든 완성을 종결짓는가.

처음 생을 부여받고 죽음으로 걸어가는 과정 안에 완성이 종용될 수 있나. 

이 연작 속에서 나는 미완성인 ‘나’와 함께 한 프레임 안에 담길 것이다.

완성의 판단은  타자가 내리는 것일 테지만 완성을 위한,

그 첫 발자국이 될 것이며, 나 자신의 완성이 아닌 다른 사람의 

완성을 위한 발화점으로서도 도움이 되었으면 좋겠다.   

Derived self-portrait series

Drawing series

20170604_221730.jpg

16.6x17.2 pen on paper 2016

어형진_태아.jpg

Born 53.0x45.5 oil on drawing board 2017

 

savior 130.3x97.0 oil on canvas 2017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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“아름다움의 힘으로 순결을 중매로 변신시키는 것이, 순결의 능력으로 아름다움을 자기와 비슷하게 

변화시키는 것보다 더 빠르니까. 이게 전에는 궤변이었으나, 지금은 세상이 그걸 증명하고 있지요,

그럼에도 불구하고 난 스스로 문책 할 수 있다는 죄들 때문에 

어머니가 날 낳지 말았으면 좋았을 거라고, 난 대단히 오만하며 복수심에 불타고, 야심만만하며,

내가 범할 수 있는 죄목은 생각을 해보거나, 상상 속에서 형체를 부여하거나,

간을 두고 행동에 옮길 수 있는 숫자보다 더 많다고…”

(‘햄릿’중 오필리아와의 대화)

 작가의 작품은 자신을 표상 할 수밖에 없다. 이번 작업 뿐 아니라 변화해 가고 있다고 생각되던 

작품의 노선은 되돌아보면 같은 선상에 놓여 있었다.

작품을 카타르시스의 목적으로 쓰면 안된다고 한다. 이는 맞는 말이고 따라야 할 말이다.

어느 정도는 자신의 신념이 필요하다고는 하나,  그걸 넘어 예술이 배설의 욕구를 위한 도구로 사용되면 어떤가. 결코 옳다고는 단언 할 수 없다.

 

작업을 시작할 때 수많은 이론과 이념을 거쳐 하나의 가설을 완성해 적용했다고 확신했지만, 

그동안의 작업물들은 결국 배출을 위한 수단이었으니.  부끄럽게도 나는 자각하고 있었다.

그래서 작업을 사람들에게 보여주어야 할 때가 오면 여러 잡기적인 지식과 개념들로 점철해 

아름다움의 힘으로 순결을 중매로 변신 시킬 수 있었다. 이는 나쁜 것은 아니나 그다지 좋은 것도 아니다.

작품은 관객의 동조가 필요하고 공감이 필요하다. 물론 나의 작품에 그들이 동감할 수 있는 

요소가 없는 것은 아니나, 이대로 계속 작업을 진행하다간 

내 자신의 주체에 갇혀 보이지 않는 감옥에서 홀로 소리 지르고 있게 되는 것은 아닌가하는 회한이 든다.

 

-2016 어형진 작가노트 중

Untitled 17.3x18.9 mix material on paper 2017

Untitled 18.9x21.5 mix material on paper 2017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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Untitled 15.3x26.5 mix material on paper 2017

Untitled 16.2x26.5 mix material on paper 2017

Footprints for 2018 work

17.2x27.6 mixed material on paper 2017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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